- 1부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
19세기 중반까지도 호주 내륙의 많은 부분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지만, 영국인들은 점점 호주 대륙을 탐사해 나가면서 자신들의 정착지를 확대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원래 이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원주민들은 영국인들의 도착과 함께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원주민들은 영국인들로부터 천연두와 결핵과 같은 질병에 옮았는데, 이들은 이전에 이러한 질병을 접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고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일으켰습니다.
1789년의 한 기록에서는 천연두로 인해 한 부족의 90%가 사망했다고 쓰여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질병으로 인한 피해가 의도치 않은 것에 가까웠다면, 이와는 반대로 영국인들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자행된 피해도 있었는데요.
예를 들어 많은 원주민들이 영국인에 의해서 납치되어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일부 영국인들은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들어가 어른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 납치한 이후, 이들을 필요로 하는 고용주들에게 돈을 받고 팔아넘겼습니다.
고용주는 싼 값을 주고 원주민들을 데려왔고 이들에게 임금은커녕, 평생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했죠.
'블랙 버딩(Blackbirding)'이라 불리는 이러한 현상은 무려 1970년대까지도 일부 지역에서 지속되었습니다.
내륙으로 계속 들어오는 영국인들의 정착지와 영국인들의 이런 범죄행위에 맞서 일부 원주민들은 무력으로 저항하기도 했는데요.
사실 이런 무력 저항은 1788년 “제1함대”가 들어온 직후부터 늦게는 1934년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항의 결과는 많은 경우 부족의 몰살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원주민과 영국인의 전쟁으로 4만여 명의 원주민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역사가들은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수의 원주민이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영국인들의 원주민에 대한 사살을 집단학살에 해당하는 '제노사이드(genocide)'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도 있죠.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28631&cid=43667&categoryId=43667
영국인들이 원주민에 대해서 벌인 만행의 정점은, 일명 “도둑맞은 세대” 혹은 “도둑맞은 아이들”이라고 불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영국인들이 원주민들의 아이들을 부모의 동의 없이 부모들로부터 분리시켜서 임의의 장소에 옮긴 것에서 시작된 현상이었는데요.
자신들이 호주 대륙에 도착한 이후, 앞서 말씀드린 여러 가지 이유로 원주민의 인구가 급감하는 것을 목격한 영국인들은 원주민들이 스스로를 보존할 힘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죠.
그리고 스스로를 유지할 힘이 없는 원주민들 대신 자신들이 원주민들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아이들이라도 키워야 한다는 명분 하에 원주민의 자녀들을 마음대로 부모로부터 떼어내어 아무런 연고가 없는 '제3의 장소'에서 집단적으로 양육합니다.
식민지의 경찰에게 원주민의 아이들을 마음대로 데려갈 수 있도록 권한을 준, 1869년 법의 이름이 “원주민 보호법(Aboriginal Protection Act)”이라는 것은 원주민을 대하는 영국인들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죠.
심지어 이러한 현상은 무려 1970년대까지도 부분적으로 지속되었습니다.
특히 부모 중 어머니만 원주민인 혼혈 아이들이 이러한 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1997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이로 인해 부모로부터 분리된 아이들의 수가 최소한 10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를 감안한다면, 왜 오늘날 원주민들 사이에서 앞서 말씀드린 “호주의 날”이 “추모의 날”, “침략의 날”, 혹은 “생존의 날”로 불리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점점 규모가 커지던 호주 대륙의 정착지들은 1900년 무렵 퀸즈랜드, 뉴 사우스 웨일스, 빅토리아, 태즈메이니아,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여섯 개의 큰 식민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요.
이들은 1901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이 무렵까지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에 살고 있는 이들이 영국으로부터 분리된 독자적인 민족의식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런 민족의식은 이후 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점차 싹트게 되는데요.
1차 세계대전에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에서 40만여 명의 사람이 참전했고, 그중에서 6만여 명이 사망하고 15만여 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특히 “호주와 뉴질랜드 군단”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서 싸우면서 점차 영국과는 분리된 독자적 정체성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1차 세계대전의 많은 전투 중에서도 무엇보다도 호주 군단이 큰 피해를 입은 '갈리폴리 전투'를 호주 민족의 탄생 시점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통용됩니다.
자신들과는 직접적인 관련성이 적은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많은 희생을 했기에 호주인들은 전쟁 후에 영국에 대해서 보다 강한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1931년,
영국에서 웨스트민스터 헌장이 발표됩니다.
웨스트민스터 헌장의 결과 호주는 독립적인 외교권과 입법권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사실상의 독립을 뜻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날의 우리가 알고 있는 호주의 탄생 배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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