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 역사

벨기에의 탄생 역사! 한방 정리_(2)

by 루팡이 되자 2020. 5. 14.
반응형

https://hyuck99tvnews.tistory.com/entry/XFile-2

- 1부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

 

 

 

바로 1830 8 25일!

 

오늘날의 벨기에의 수도인 브뤼셀의 한 오페라 극장에서 빌럼 1세의 생일을 축하하는 오페라 공연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날 극장에서는 포르티시의 벙어리라는 오페라가 공연되었는데, 이는 17세기, 스페인의 지배에 저항하는 나폴리인들의 반란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즉! 오페라의 소재 자체가 벨기에 지역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기 충분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미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혁명을 촉구하는 포스터가 브뤼셀에서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빌럼 1세의 생일 축하 공연은 3일에 걸쳐 이루어질 예정이었는데요. 포스터에는 '23 : 불꽃놀이, 24 : 화려한 조명, 25 : 혁명'이라고 대놓고 써있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빌럼 1세는 안일한 태도로 공연을 강행합니다.

 

결국 오페라의 듀엣곡 중 하나인 조국의 신성한 사랑이라는 노래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이 자리를 박차고 거리로 나가,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거리에서 네덜란드 연합왕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치며 점점 더 많은 대중을 끌어들였고 관공서를 점거했습니다.

 

이미 사회적으로 빌럼 1세와 네덜란드 연합왕국에 대한 불만이 아주 큰 상황이었기 때문에 혁명의 물결은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이튿날이 되자 리에주, 베르비에, 위이, 나뮈르, 몽스 그리고 뢰번과 같은 벨기에 지역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마찬가지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죠.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빌럼 1세는 일단 군사적인 방법을 선택했는데요.

 

그러나 4일 동안 펼쳐진 브뤼셀에서의 시가전 동안 그는 1 2천 명의 군대를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브뤼셀에서의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는 데 실패했고, 양쪽 합쳐서 1200명이 넘게 사망한 이후에야 그는 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게다가 그의 군대 중에서 남네덜란드 지역에서 징집된 군인들은 오히려 명령을 거부하고 탈영을 하기도 했습니다.

 

 

군사적 시도가 실패하자 빌럼 1세는 방법을 바꿔서 유럽의 강대국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이 주축이 된 1830 12월의 런던 회의에서 열강들은 벨기에 문제를 논의했는데요.

 

사실 프랑스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1815년 빈 회의를 통해서 네덜란드 연합왕국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벨기에의 독립에 대해서 부정적이었습니다.

 

이는 특히 벨기에가 독립할 경우 독립한 벨기에가 프랑스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일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런던 회의에서 프랑스는 벨기에의 독립을 지지하기도 했죠.

 

그러나 나머지 국가들 중 어느 누구도 유럽에서의 새로운 전쟁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의 군대를 파견해서 벨기에를 진압할 의사는 없었기에 이들은 결국 독립된 벨기에가 중립국으로 남는다는 조건 아래 벨기에의 독립을 승인합니다.

 

 

 

한편 런던 회의가 열리기 직전인 1830 11, 벨기에에서는 국민회의가 소집되어 벨기에가 독립한 이후의 헌법에 관한 논의가 시작됩니다.

 

투표로 선출된 국민회의의 의원들은 미래 벨기에의 정치체제로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정작 누가 왕이 될지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몇 명의 후보를 물색하게 됩니다.

 

 

 

여러 명의 후보 중에서 유력했던 첫 번째 후보는 1830년 프랑스 혁명을 통해 프랑스의 왕이 된 루이 필립의 아들, 즉 왕자였던 루이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안그래도 독립된 이후 벨기에가 프랑스의 꼭두각시가 될 것을 걱정했던 영국과 다른 외국 정부들로부터 거절되었죠.

 

따라서 벨기에인들은 프랑스 출신이 아닌 후보를 찾기로 결정합니다.

 

게다가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출신의 인물들도 배제되어야 했는데 이들 중 하나가 왕이 될 경우 출신국의 영향력이 강해질 것을 우려하여 강대국들이 서로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잡한 조건 떄문에 결국 의외의 지역의 인물이 왕으로 결정되는데요.

 

'작센-코부르크-잘펠트'라는 독일 지역의 한 작은 공국의 공작 막내아들로 태어난 '레오폴트'라는 인물이 바로 새로운 벨기에의 왕으로 선택받게 됩니다.

 

그는 프로이센이 아닌 독일의 한 작은 공국 출신이었고 영국 왕실의 공주였던 샬럿과 결혼했기 때문에 영국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았지만,

 

공주는 정작 1817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완전히 영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지도 않은, 모든 이해관계 세력들이 적당히 만족할 수 있는 후보에 가까웠죠.

 

 

 

사실 이런 적당히 애매한 위치 때문에 레오폴트는 벨기에 독립 혁명 얼마 전에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그리스의 왕위에 오르라는 제안을 받았는데 당시 그는 이 자리가 불안하다고 여겨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벨기에 왕위에 오르라는 제안을 받은 레오폴트는 이번에는 제안을 받아들여 1831 7 21일 브뤼셀의 왕위 즉위식을 거행하고 공식적으로 벨기에의 왕이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입헌군주국 벨기에의 왕실의 출신은 정작 벨기에와는 별 상관이 없었던 셈입니다.

 

 

 

이렇게 벨기에라는 국가는 네덜란드에 대한 벨기에 인들의 저항과 고도의 외교적 눈치싸움의 결과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공식적으로 역사에 등장합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