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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

'베르사유 궁전'의 얽히고 설킨 역사!_(2)

by 루팡이 되자 2020.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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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

 

 

 

 

프랑스혁명이 시작된 이후 베르사유는 점차 권력의 중심지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혁명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 시민들의 강력한 요구로 루이 16세와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파리에서 지내게 되죠.

 


1793년, 루이 16세와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되었고, 이후 나폴레옹은 본인이 베르사유 궁전에서 지낼 계획을 검토하지만 주변의 강력한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합니다.

 

 


이후 별일 없이 조용하게 지내던 베르사유 궁전은,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을 통해 다시 프랑스 국민의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게 됩니다.

당시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프로이센은 파리를 포위하고 있었는데요. 프로이센 군은 파리를 포위하면서 베르사유 궁전을 사령부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또한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는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프로이센을 넘어서서 전독일의 황제로 즉위합니다.

 

 

 


그전까지 독일은 무수히 많은 작은 국가들로 쪼개져 있었는데요.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통일된 형태의 독일은, 바로 빌헬름 1세의 대관식과 함께 탄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적 사건이 베르사유 궁전에서 일어났으니, 프랑스 국민들은 당연히 엄청나게 분개하였습니다. 이후 프랑스에서는 반독일 정서가 매우 강해집니다.

독일에게 복수를 해줘야 한다는 여론이 몇십 년 동안 지속되는데요. 이때 프랑스 국민들이 자신들의 한을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 기회는 바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것이죠.

 

프랑스인들은 의도적으로 베르사유 궁전을 강화 협상의 장소로 선정하는데요. 제1차 세계대전 후 독립을 꿈꿨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김규식을 베르사유에 파견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우위를 점한 프랑스인들은 강화 협상 끝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청구했는데요. 그러나 배상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베르사유 조약 231조였습니다.

 

여기에는 “전쟁으로 발생한 모든 피해와 손실의 책임은 독일과 독일의 동맹국에게 있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전쟁의 모든 피해에 있어서 독일을 책임국으로 규정함으로써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독일로 하여금 책임지게 하는 내용이었죠.

 

이런 조약의 내용에 대해서 독일에서는 전국적으로 반발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패전한 독일은 결국 조약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죠.

 

 

이 조약이 체결된 이후, 독일에선 반프랑스 감정이 굉장히 심해졌습니다. 당시 “베르사유”는 독일의 반프랑스 감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단어가 돼버립니다.

 

그리고 당시 독일인들의 반프랑스 감정을 누구보다 잘 이용한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히틀러입니다.

 

히틀러는 선거유세에서 수차례 베르사유 조약을 언급하면서, 조약을 체결했던 기존의 정치인들을 조국의 배신자로 규정하고, 자신이 집권하면 베르사유 조약을 폐지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히틀러의 전략은 독일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크게 성공하는데요. 이는 이미 당대에도 “나치 움직임의 출발지는 뮌헨이 아니라 베르사유”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에서도 확인됩니다.

 

 

 

 

이렇게 프랑스와 독일 양국에서 서로에 대한 복수의 상징이 되었던 베르사유는, 2차 세계대전 후에 양국의 화해를 겪으며 그 의미가 변하게 됩니다.

 

2003년에는 역사상 최초로 개최된 프랑스-독일 내각 공동회의가 베르사유에서 진행되었죠.

 

 

 

역사의 흐름 속에서 초기에는 유럽의 절대주의 왕정을, 그리고 그 이후에는 프랑스와 독일 양국의 상호 적대감을 상징했던 장소인 베르사유 궁전은 이제 매년 3백만 명 가까운 여행객이 방문하는 관광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르사유 궁전은 단순히 사치스럽고 화려한 생활이 이루어진 장소가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고도의 정치적 의미를 가졌었던 상징적인 장소였음을 알아보았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에 방문할 때 이런 역사를 생각해본다면 더 의미 있는 관람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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