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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

서독-동독, 독일 통일의 과정 및 배경. 어처구니 조심!

by 루팡이 되자 2020.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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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이후, 초토화되었던 나치 독일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의해 네 등분으로 쪼개져 분할 통치되는 대 치욕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국가 주권을 완전히 상실한 독일은 연합국에 의해 비군사화, 탈나치화, 모든 산업시설 철거와 같은 보복성 조치를 그대로 시행해야만 했으며,

 

이 조치들은 독일이라는 국가가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철저히 짓밟아 버리는 정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종전 이후 심화되는 냉전체제 속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3국은 소련과 동독의 공세를 막아서기 위해 3개의 점령지를 하나로 통합하기로 협의하게 됩니다.

 

이렇게 서독, 즉 '독일 연방 공화국'이 탄생하였고, 독일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또한, 3국에 의해 진행 중이던 산업시설 해체 계획동독과 소련에 대한 견제를 위하여 1946년 이후로 전면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이후 서독은 자유주의 진영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어 내면서 주권회복과 통일에 대한 희망을 조금씩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강국들의 심화되는 냉전 덕분에

전부 되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954년, 마침내 서독파리 협정을 통해 패전으로 잃었던 주권을 다시 한번 되찾게 되었고,

 

이렇게 자신감을 회복한 서독은 1955년, 소련과 뜻을 같이 하는 동독을 인정하지 않으며, 국제적으로 서독만이 독일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밝혔고, 이에 맞는 정책을 취하게 됩니다.

 

 

즉,

 

“소련을 제외한 동독과 수교를 하는 모든 국가들과도 일절 외교관계를 맺지 않겠다”  라는

 

할슈타인 독트린을 선언하게 됩니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61551&cid=40942&categoryId=31657

 

할슈타인원칙

1955년 9월 서독과 소련간 정식국교 수립이래의 서독외교정책의 기본원칙. 서독만이 자유선거에 의한 정부를 가진 유일한 독일의 합법국가이므로 서독은 동독을 승인하는 나라와는 외교관계를 단절(대독전승국인 소련만은 이 원칙에서 예외)하겠다는 것이다. 당시 외무장관 W.할슈타인이 작성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서독의 기독교민주동맹(CDU)이 취하던 반공외교정책의 축으로서, 이 원칙은 유고슬라비아 ·쿠바 등에 적용되었지만, 루마니아와의 국교 재개(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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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서독의 조치는 동독을 또 하나의 국가로서 인정하게 되면, 독일의 분단 상태가 더욱 고착화될 것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고,

 

동독 또한 당연하게도 이에 크게 반발하며 서독을 비난하고 나서면서, 양국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지기 시작합니다.

 

설상가상 1961년 동독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이주하는 시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베를린 장벽이라는 콘크리트 벽을 세워버리면서 이 같은 갈등은 점점 더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이후 동독, 서독 간 대립 체제는 10년 이상 지속되며 동독을 효과적으로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시켰습니다.

 

그러나 ‘할슈타인 독트린’

서독 스스로에게도 외교적 제약을 가할 수밖에 없는 양날의 검과도 같은 정책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서로가 점점 지쳐가던 60년대 말, 국제질서는 어느덧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합니다.

 

서독일본이 새로운 경제대국으로 부상하였고, 소련 중국대립하기 시작하였으며, 제3세계 세력국제무대에 새롭게 등장하는 등 세계는 '미-소 양극체제'에서 여러 국가들 간의 '다극체제'변화하기 시작합니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24950&cid=47323&categoryId=47323

 

다극 체제

60년대 이후 동 · 서 세계를 대표했던 미 · 소의 지도적 위치가 크게 약화되면서 나타난 국제 정치 상황. 유럽 공동체의 성공, 일본의 경제적 성장, 제3세계의 정치 세력화, 중국의 국제 무대 등장 등을 원인으로 들 수 있으며, 이데올로기가 쇠퇴하고 자국의 이익을 앞세우는 상황으로 변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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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끝없는 군비경쟁에 지친 미국소련서로의 세력권을 양보하며 한 발씩 물러나게 되면서, 냉전긴장 상태가 어느 정도 완화되는 시기, 일명 데탕트’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기 시작합니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82530&cid=40942&categoryId=31656

 

데탕트

1970년대 미국과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 ·서 진영 간의 긴장완화. 데탕트는 프랑스말로 완화·휴식을 뜻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을 양극으로 하는 냉전체제가 수립되었으나 1960년대 말부터 변모의 조짐이 생겨났다. 서독과 일본의 급성장, 제3세계의 대두, 중소분쟁 등으로 국제정치는 이데올로기보다 국가이익을 우선하게 되었다. 또한 영국·프랑스·중국 등 핵무기 보유국의 증가로 국제질서는 양극체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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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에 따라 독일 내부에서도 변화에 대한 목소리가 점차 커져가기 시작하면서, 동-서독의 관계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1969년에 새로 취임한 서독의 총리 ‘빌리 브란트’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동-서독 간의 무모한 대립은 통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동구권 공산국가들과의 적극적 외교 관계를 추진하는 동방정책을 시행하게 됩니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28765&cid=43667&categoryId=43667

 

동방정책

동구 공산권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통일 전 서독의 외교정책. | 외국어 표기 | 東方政策(한자) ostpolitik(독일어) | 1969년 서독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추진한 동구 공산권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외교정책을 말한다. 당시 브란트 서독 수상은 취임연설에서 ‘동독의 국제법상 승인을 고려할 수 없으나, 동독의 존재를 독일 내의 제2의 국가로 인정하여 동등자격의 기초 위에서 동독정부와 만날 용의가 있다.’라는 동방정책을 발표하였다. 동독을 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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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또한 서독의 압박으로 인한 외교적 제약에서 벗어나고, 다양한 국가들과의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서독의 동방정책에 맞장구 쳐주면서 양 독일 간의 상호 교류는 점차 커져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십여 년간 고수되어왔던 ‘할슈타인 독트린’은 70년대에 이르러 폐기 처분되었고, 동-서독 정부는 서로 조금씩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72년 동-서독 간 기본조약 체결을 시작으로,

1973년에 UN 동시 가입을 실현시켰으며,

1976년에는 이산가족 재결합을 성사시키는 등

 

양 독일은 점차

교류확대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빌리 브란트', '헬무트 슈미트', '헬무트 콜' 총리로 이어지는 1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독은 흐트러짐 없이 동방정책을 추진하였고, 이는 1982년 '헬무트 콜' 정부의 출범 이후 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당시 서독은 경제적으로 파탄 위기에 다다른 동독을 위해 1983년부터 1984년까지 20억 마르크, 한화로 약 6000억 원에 달하는 차관제공해주었으며, 동독은 그 대가로 국경에 설치된 자동소총을 전부 철거시켜버렸는데,

 

이후에도 서독이 경제적 지원을 해주면, 동독이 그에 따라 정치적 개방을 시행하는 상호 교류 정책들이 계속해서 시행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협력은 어디까지나 양국의 동상이몽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에, 통일이라는 최종점에 도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서독 입장에서도 통일이란 지금 당장은 이루어지기 힘든 현실감 없는 미래로 보일 뿐이었고,

 

동독에게 있어서 서독과의 협력이란, 자신들의 체제 안정과 서방 국가들과의 교류를 위해 필요한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서독과 동독이 지속적인 협력을 이어가던 와중에도 동독의 경제 파탄, 선거 조작, 여행 자유의 제한 같은 거지 같은 현실은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하는 시민들을 해마다 폭발적으로 증가시켰고,

 

1989년에는 10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시위까지 일어나, 동독 정부는 새로운 법 제정을 통해 여론을 어떻게든 잠재우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부 대변인 '권터 샤보브스키'

 

여행 제한 조치가 어느 정도 완화될 것이라는 새 정책을 발표하기 위해 전국 생중계 기자회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샤보브스키'는 전날 막 휴가 복귀를 한 상태여서 여행 조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숙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권터 샤보브스키'의 기자회견

 

권터 : “…..모든 동독 국민은 베를린 장벽을 포함하여 모든 국경검문소에서 출국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로 했습니다.”

 

기자 : “어? 그게 언제부터죠?”

 

권터 : “음...… 아마도 지금.....?”

 

기자 : “그럼 서독과 서베를린에 가는 것도 전부 자유인가요...?”

 

권터 : “….그런 것 같은데요..?”

 

 

이후 이탈리아의 신문사 ANSA에 이 같은 내용이 긴급 뉴스로 즉각적으로 보도되었고,

 

그 제목은

 

“The Berlin Wall has collapsed.”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였습니다.

 

 

 

샤보브스키의 말실수로 인해

 

“여행제한이 완화되었다” 

 

라고 전해져야 할 발표는

 

“국경이 개방되었다” 

 

라고 잘못 전달되었고,

 

 

 

이는 또 이탈리아의 신문사에 의해,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 

 

라는 오보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후 로이터 통신, AP 통신, 뉴욕타임스

전 세계 언론들까지 앞다투어 이를 보도하기 시작했고, 그날 밤 동독 주민 수천 명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들면서 지금 당장의 국경 개방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수많은 인파의 압박에 눌린 경비대들은 국경을 열게 됩니다… 이렇게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세계사의 흐름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서독 정부동독 정부나 서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고, 2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다른 국가들은 독일의 통일에 대해 매우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통일은 엎질러진 물이었고,

 

동독 정부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더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살나 있었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이 반대한다고 해서 통일을 다시 취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1990년 5월,

서독과 동독 그리고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은

독일 통일에 대한 회담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공식적으로 완전한 통일

이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권터 샤보브스키’말실수 하나로 독일의 어처구니 없는 통일뿐만 아니라 역사의 흐름이 바뀌게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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